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투탕카멘의 저주 (문단 편집) === 허버트 경의 죽음과 불행? === 허버트 경은 발굴 당시에는 건강이 매우 나빠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. [[1922년]] 11월에 발굴을 지휘한 고고학자 [[하워드 카터]]가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하고 최대한 빨리 와 달라며 특급 [[전보]]를 보냈을 때, 그는 몸이 아파서 마음은 급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답장했다. 허버트 경은 몇 해나 거액을 후원하며 애타게 찾던 파라오의 무덤을 빨리 보고자 당시의 교통수준을 기준으로 대단히 빠르게, 3주 만에 이집트로 갔는데, 이때 안 그래도 나빴던 건강이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. 게다가 아래에 나오듯이 정작 그 발굴한 유물들을 가져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. 이렇듯 여러 가지 원인이 겹친 상황이었기에 건강을 잃는 것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. 결국 그는 그로부터 반년도 못 살고 세상을 떠났다. 발굴 현장에서 코브라가 카나리아를 잡아먹었다는 것은 기자가 지어낸 이야기였으며, 주인을 따라 곧 죽었다던 허버트 경의 애견도 실은 훨씬 오래 살았다. 카이로에서 [[정전(전기)|정전]]이 발생했다는 것 역시 전력 기술력이 미비한 1920년대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사건은 아니었다. 허버트 경 본인은 어떤 의미에서는 저주를 받은 듯이 운이 나쁘기는 했다. 19세기만 해도 이집트 측은 발굴 기술이 없다며 유물을 찾아내면 절반 이상은 그 발굴단의 조국으로 가져가게 했었다. 게다가 이집트는 프랑스를 상대로 [[오벨리스크]]를 시계와 교환[* 해당 오벨리스크는 프랑스 파리에 있다. 참고로 해당 시계는 20년도 지나지 않아 고장났다.]했을 정도로 고대 이집트 유물을 우습게 봤기에, 19세기에 투탕카멘 무덤이 발굴되었다면 대부분의 유물들이 지금쯤 [[영국]] 대영박물관에 있었을 것이다. 나아가 당시 이집트인들은 [[이슬람교]]와 무관한 고대 이교도의 흔적은 마음대로 하라고 할 정도로 유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. 하지만 20세기에는 이집트인들도 자국 문화재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에, 투탕카멘의 모든 유물은 해외로 반출할 수 없었다. 허버트 경은 한때 발굴을 그만두려고 했을 정도로 재정 상태도 안 좋았는데, 병든 상태에서 발굴 현장을 보기 위해 무리하게 이집트로 왔다가 유물은 못 가져간다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.[* 당시 이집트 카이로 박물관장 알 이븐 하지 라우드의 고집이 워낙 강했다. 참고로 그는 이집트 문화재 보호에 기여한 오귀스트 마리에뜨의 조수를 지낸 경력이 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